베토벤 교향곡 제5번 Op.67 ‘운명’

베토벤 교향곡 제5번 다단조 작품 67(Beethoven: Symphony No.5 in c minor, Op.67 ‘Schicksall’)은 모두 4악장으로 이루어졌다. 교향곡 제3번 《영웅》(1804)이 완성된 뒤 곧 쓰기 시작했으나 이보다도 먼저 교향곡 제4번(작품번호 60, 1806)이 완성되고 그 후 본격적인 작업이 계속되어 마침내 1808년에 완성, 빈에서 초연되었다.

이 곡의 이름은 제1악장 첫머리의 동기에 대해 베토벤 자신이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고 설명한 데 연유하고 있다. 베토벤의 귀에 이상이 생기고, 영원한 애인으로 알려진 테레제 브룬스비크와의 파국, 나폴레옹의 침공 등 시련이 겹쳤던 시대의 작품이다. 기법적으로도 뛰어나 마지막 악장에서는 트롬본 3, 피콜로 1을 곁들여 빛나는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다.

1. 작품의 개요 및 배경

1828 년 어느 날 파리 국립 음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대학의 대강당에서는 베토벤의 제 5번 교향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많은 음대 교수들과 유명한 작곡가, 지휘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 위대한 작곡가의 걸작품이 연주되게 된 것이다. 다음은 이 대학의 교수였던 브리엔느씨가 이 연주회에 참석하였다가 그의 자서전에 남긴 글 한 도막이다.

“나 는 그날 이 유명한 음악가의 작품 연주에 초대를 받고 좌석에 앉았습니다. 드디어 장쾌한 음악의 연주가 시작되자 청중들은 숨을 죽이고 빠져들었습니다. 드디어 음악회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박수를 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박수 칠 생각을 그만 잊어버린 것입니다.

한참 후에 누군가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드디어 청중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여 나도 박수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자를 집어 들고 머리를 찾으니 머리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곡이 [운명]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까닭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 때문이다. 그의 제자이며 베토벤의 전기(傳記)로서 유명한 신틀러가, 하루는 이 곡의 제1악장 서두에 나오는 주제의 뜻을 물었더니 베토벤은,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하면서, 힘찬 몸짓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이 교향곡은 [운명]이라는 참으로 극적(劇的)인 제목으로 불리게 되었고, 또 그것이 인기를 높이는 큰 원인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베토벤의 비통한 생애와 너무나도 잘 통하는 말인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 [다다다다-] 하고 두드리는 동기(動機)는, 베토벤이 비인의 공원을 산책하다가 들은 새소리를 소재로 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가 새삼스럽게 발명해 낸 것은 아니다.

교향곡 속에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도 이미 썼던 것이다. 게다가 이 4개 음부(音符)의 움직임이라는 것이,실은 아무 변화도 가락도 없는, 말하자면 아무 데나 뒹굴고 있는 돌무더기같은 것이어서, 그것만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훌륭한 계산에 의해, 전곡을 통하여 완벽한 구성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극적(劇的)인 장대(壯大)한 음의 확산(擴散)이 되어서 만인을 한결같이 감격케 한다. 정히 하나의 경이(驚異)라 아니할 수 없다.

음악학자 리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이 교향곡은 끝악장을 목표로 진행되며, 전체가 그렇게 계획된 것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분석은 옳다. 왜냐하면, 제 1악장 서두의 [다다다다-]라는 모티프가 이 악장만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 3악장에서도, 제 4악장의 재현부 직전에서도 변형되어 나타나서 전 악장을 튼튼히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882년 파리에서 이 곡이 연주되었을 때, 한 노병은(老兵)은, “이것은 황제(皇帝)다.”하고 외쳤다고 한다. 그런 뒤에 한때는[황제교향곡]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슈만은 이 곡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들어도, 마치 자연의 현상처럼 외경(畏敬)과 경탄이 새로와진다. 이교향곡은 음악의 세계가 계속되는 한 몇 세기(世紀)고 간에 남을 것이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한 것은 1808 년(38세)이다. 작곡에 착수한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대개<제 3번-영웅>을 완성한 직후인 1804 년 무렵부터 진지하게 손을 댄 것 같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1795 년(25 세) 무렵의 노우트에 이 곡의 선율이라고 생각되는 대목의 스케치가 있다고 하니, 통산하면 약 12 년이나 걸린 셈이 된다. 이런 점을 보면 베토벤은 정말로 신중파(愼重派)다. 하기는 그랬으니까 이같은, 하나의 음도 허실이 없는, 견고하고 정밀한 구성을 갖춘 걸작이 이루어졌지만.

<암흑에서 광명으로!> 이것은 평생을 통한 베토벤의 신조였는데, 그것이 작품성에서 보다 힘차고 감동적으로 표현된 것이 이 [제 5 번]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으로서 보다 장대(壯大)하고, 보다 울림이 좋고, 보다 정돈된 곡은 이 곡 말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의 의지의 응결(凝結)이라는 면으로 볼 때는 이 [제 5번]이 단연 대표적이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는 베토벤=[운명], [운명]=베토벤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런데 요즘 외국에서는 [운명]이라는 별칭을 쓰지 않고 그냥 [제 5번]만으로 표시한다. 레코드를 보아도 역시 그렇다. [제 3번] [제 6번] 등은 뚜렷이 [Eroica], [Pastoral] 등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유독 [제 5번]의 레코드 자켓에는 아무 표지가 없다.

그 이유는 [영웅]이나 [전원]은 베토벤 자신이 붙인 명칭인데 반해서, 이 [제 5번]에 대해서는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다는 데서 후세에 [운명]이라는 별칭이 생겼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별칭이 너무나도 사랑을 받고 있어서, [운명]이라 해야 곧 알지, [제 5번]이라면 빨리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되어 있다. 언젠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줄 안다.

굳이[운명] [운명]하고 강조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가라 앉혀서 조용히 듣고 있노라면, 높고 두꺼운 운명의 벽을 하나하나 넘어서 가시밭길을 돌진하는 베토벤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2. 작품의 구성 및 특징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한 것은 1808 년(38세)이다. 작곡에 착수한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대개[제 3번-영웅]을 완성한 직후인 1804 년 무렵부터 진지하게 손을 댄 것 같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1795 년(25 세) 무렵의 노우트에 이 곡의 선율이라고 생각되는 대목의 스케치가 있다고 하니, 통산하면 약 12 년이나 걸린 셈이 된다.

이런 점을 보면 베토벤은 정말로 신중파(愼重派)다.하기는 그랬으니까 이같은, 하나의 음도 허실이 없는, 견고하고 정밀한 구성을 갖춘 걸작이 이루어졌지만.

제1악장 Allegro con brio. 소나타형식

네 개의 음으로 된 그 유명한 제1주제가 힘차게 연주된다. 이것은 남성적이고 장쾌하고 호방하다.
이 주제는 여러 모양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면서 곡은 클라이맥스로 향하여 박진감이 더해진다. 호른 독주의 브릿지에 이어 바이올린, 클라리넷, 풀륫이 차례로 제2 주제를 부드럽게 연주한다.

보통 제1주제가 남성적이면 제2주제는 여성적이고 부드럽게 구성되어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 발전부에서는 화려한 음색의 호른의 연주에서 시작하여 시종일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주제는 종횡무진한 활약을 거듭하여 드디어 최고의 정점에서 재현부로 이어진다. 매력적인 오보의 Adagio 연주가 잠간 휴식감을 주고는 다시 박진감을 더하여 나가다가 화려한 코다로 장엄한 끝마침을 한다.

제2악장 Adagio con moto. 변주곡 형식

변주곡 형식이지만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성이다. 비올라와 첼로가 연주하는 주재가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역시 곡은 전체적으로 긴장감도는 구성이다. 처절하게도 위풍당당한 제2주재가 상행의 가락을 연주하면서 박진감으로 넘쳐나게 곡을 이끌어 나간다. 이어 1, 2, 3의 변주가 곡을 수놓아가면서 사이사이에 힘찬 제 2주재를 넣어 더욱 처절하게 운명과 싸움을 계속하여 나가는 것이다. 로망롤랭은 이 악장을 베토벤이 운명과 엎치락뒤치락 투쟁하는 장면을 그린 것 같다고 표현하였다.

제3악장 Allegro. 스케르쪼와 트리오

스케르쪼의 주재는 상행하는 분산화음형의 가락으로 나타나지만 곧 이어 운명의 주재가 그 모양을 바꾸어 다시 3박자로 나타난다. 두 개의 주재가 번갈아 주고 받다가 트리오 부분으로 넘어간다. 트리오 부분은 푸가기법이 도입되어 박진감 넘쳐 나면서도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다시 스케르쪼가 나타나고 드디어 폭풍 전야의 고요함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제4악장 Finale,, Allegro. 소나타형식

3악장의 끝에서 폭풍전야의 고요함은 크레센도 되다가 악장 사이의 중단이 없이 드디어 폭발하여 승리의 함성을 내어 지르는 제1주제를 튜티로 연주한다. 베토벤은 드디어 운명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승리의 함성을 내어 지르는 것 같다고 로망롤랭이 말했다. 그래서 이 악장을 ‘승리의 악장’이라고도 불린다.

1, 2, 3 악장은 사실 이 4악장을 향하여 힘을 축적시켜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연결부분을 거쳐서 제2주제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연결부분과 코데타를 거쳐 곡은 힘차게 발전부를 향해 나간다. 제1주제와 제2주제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발전부는 힘찬 발전을 계속하다가 잠시 3악장의 끝부분 폭풍전야를 만들었던 부분을 다시 내 세운 다음 재현부로 돌입한다. 이 곡의 특징인 대단한 규모의 코다로 화려한 끝을 장식한다.

3. 초연 및 출판

일단 곡 자체는 1808년 초에 완성되었으나 초연은 1808년 말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이 때문인지 이 곡은 단독으로 초연되지 않고 당시에 초연을 기다리고 있던 다른 곡들과 함께 초연되었다.

1808년 12월 22일에 빈의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열린 베토벤의 세 번째 ‘아카데미’ 음악회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기념비적인 이벤트였는데, 음악사적으로 이처럼 고퀄리티의 작품이 한번에 대거 초연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적인 의미에 비해 초연 자체는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추위 속에서 무려 네 시간 동안 진행된데다 연습도 부족했고 심지어 작곡가가 시간에 쫓겨 악보도 완성하지 못한 곡도 있었기 때문.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워낙 파격적인 작품들이 대거 초연되었기 때문에 공연이 끝난 후 온갖 논란과 하마평이 난무했으며 이 때 초연된 작품들은 이후에 연주될 때마다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날 연주된 곡(특히 초연된 곡)들이 모두 만만치 않은 작품이었기 때문에 공연 직후부터 각 곡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해석이 난무했다. 이중 5번 교향곡에 대해서는 대체로 3번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너무 길고 복잡하다’ 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마초적인 이미지와 군사적인 승리감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음향 덕분에 음악인들의 평가와 별도로 대중적으로는 굉장한 인기를 얻었고 베토벤은 이제 스승이었던 하이든과 맞먹을 정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악보는 초연 후 해를 넘겨 1809년 4월 파트보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트텔을 통해 출판되었으며 같은 해 말에 일부 수정이 가해진 수정판이 출판되었다. 총보는 한참 늦게 간행되었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1824년이 되어서야 간행되었다. 헌정은 당시 후원자였던 로브코비츠 공작과 빈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라즈모프스키 백작에게 동시에 이루어졌다.

4. 추천음반

 

1) 아르투르 니키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아서 니키쉬
    아르투르 니키쉬

아르트르 니키쉬의 이 음반은 명반이기에 앞서 역사적인 음반이다. 1877년 에디슨이 말하는 기계, 유성기를 발명하고, 1887년 독일인 벌리너가 미국에서 현재의 디스크 방식의 개량형 유성기를 완성한다.

그 당시의 녹음방식은 나팔로 소리를 모으는 기계적인 수단(어코스틱 녹음 소위 나팔통식 녹음)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이 녹음방식에서는 300Hz에서 1,500Hz(대부분의 사람의 음성)을 넘는 광역의 녹음이 불가능하였다.

나팔 앞에서 소리를 내는 것이 제일 소리를 모으는 데 유리했기 때문에 어코스틱녹음 시대의 음원으로는 성악이 가장 적합했다. 관현악곡은 어코스틱 녹음으로는 가장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서 경원시당했던 장르였다.

지휘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13년 독일의 오데온회사가 현악만으로 편성한(오데온 현악 오케스트라) 베토벤의 교향곡 제5,6번 전곡을 녹음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1913년 11월 20일 니키쉬가 베를린에서 베를린 필과 녹음한 포리돌 레이블의 4매, 8면의 78회전(SP) 레코드가 가장 오래된 운명교향곡이다.

1855년-1922년에 생몰한 아르트르 니키쉬는 처음에 바이올린 주자로 시작하여 1876년 라이프찌히 가극장의 지휘자로 데뷔한 전문 지휘자이다. 베를린 필은 니키쉬에 이르러 최초의 황금기를 구가하면서 이 관현악단으로 하여금 드높은 자부심을 갖게 해 주었다.

최초의 교향곡 녹음임과 동시에 운명교향곡인 이 음반은 현악 부분에서는 콘트라베이스나 첼로가 생략된 바이올린 6개, 비올라 2개의 편성이 말해주듯, 현대의 운명에 비해 참으로 가날픈 음악이지만, 후세에 전해지는 귀중한 음악문화 유산이다. 이 음반은 니키쉬의 진가를 발휘한 녹음이 아니다라는 비평이 있으나, 빠른 템포(이는 SP시대 녹음의 공통적인 속성인지도 모른다)속에 적당히 밀면서 당기는 지휘에는 근대 지휘법의 선각자로서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이 수입 CD는 SP음반의 복각반으로 복각반 특유의 지글거림이 귀를 거슬리게 하지만 80년 전의 거장의 지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한 일이다. 자세히 들어보면 악장 중에서 연결부분을 감지할 수 있다.

 

2)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빌헬름 푸르트방글러
빌헬름 푸르트방글러

1922년 니키쉬가 서거한 후 베를린 필의 바톤을 이어받은 푸르트뱅글러만큼 운명 교향곡에 혼신의 정열을 기울인 지휘자는 아직까지 없다. 그는 2차 대전을 기점으로 전쟁전에는 148회, 전후에는 73회의 운명을 지휘했다.

1926년 베를린 필과의 연주(포리돌 SP녹음)부터 1954년 5월 23일 베를린 필까지 무려 11종의 음반이 출반되어 있다. 그의 연주에는 주관성과 즉흥성이 함께 존재한다. 악보에 충실한다는 구실로 기계적으로 연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고로 그의 11장의 운명은 맛이 다르다. 어느 것이 객관적으로 훌륭한 연주인가를 판단하기 보다, 푸르트뱅글러가 연주한 시점의 주관적인 해석과 감정으로 표출된 음반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는냐의 문제이다.

1936년 독일의 나찌스는 푸르트뱅글러를 국내에 계속 묶어두기 위해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총감독에 임명한다. 이러한 전력으로 인하여 2차 대전이 끝나자 전범으로 몰려 추방되었으나 1947년 1월 그의 무죄가 밝혀지고 5월에 베를린 필로 복귀한다.

5월 25일부터 4일간(25, 26, 27, 29일) 미군병사를 위한 쇼극장으로 변해 있었던 티타니아 궁에서 역사적인 그의 베를린 필의 복귀 기념 연주회가 개최된다. 가혹한 운명과 투쟁하여 그 운명을 굴복시키는 베토벤의 생애같이, 푸르트뱅글러는 북받치는 열정으로 5번 교향곡을 4일 연속 연주한다.

이때의 연주는 어떤 연주회보다 감정에 벅차 있었고 열기에 넘쳐 있었다. 25일의 연주도 이태리의 포니트 체트라 레이블로 발매되어 있으나, 27일의 연주(DG 성음 SEL-RG911)가 명연으로 알려져 있다.

1953년 비엔나 필과의 연주도중 실신상태에 이르러 잠시 연주활동을 중단하다가 이듬해 54년 비엔나 필과 스튜디오에서 이 운명을 녹음했다. 죽기 9개월 전의 이 연주는 47년의 연주와 비교해 그의 감정과 박력이 무서울 정도로 절제되어 있고, 너무나도 온건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 운명에 여유가 있으며 스케일은 장대하다. 비엔나 필의 음향은 생동감에 넘쳐있고 잘 조화되어있다.

3)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NBC 교향악단

토스카니니는 푸르트뱅글러와 함께 20세기의 지휘계를 양분하는 거장으로 평가된다. 지휘자의 주관적인 해석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난 지휘자가 토스카니니인데 이에 대한 반동으로 푸르트뱅글러의 지휘가 시작되니 이 두 지휘자는 상반된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다.

푸르트뱅글러는 즉흥성, 즉 연주의 1회성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토스카니니는 즉흥성을 완전히 배제해버린다. 운명교향곡의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는 푸르트뱅글러에게는 때에 따라 알레그로 그 이상일 수도 있고 그 이하일 수도 있지만, 토스카니니에게는 알레그로 콘 브리오 그 자체다.

그의 연주는 언제 들어도 메트로놈으로 재듯 똑 같다고 한다. 하지만 토스카니니 자신는 “사람들은 나의 연주가 항상 똑같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야. 난 결코 똑 같이 연주하는 법은 없어. 연이어 두번을 지휘한다고 해도 똑 같이는 연주하지 않아.”라고 부정하고 있다.

1867년 이태리의 파르마에서 출생한 토스카니니는 첼로 연주자였다가 스코어를 암보한다는 우연한 계기로 1886년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성공적으로 지휘하게 되어 지휘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뉴욕에서 토스카니니를 위해 조직된 NBC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1937년부터 1954년까지 17년동안 활약하면서 많은 녹음을 남기고 있다. 그는 신고전주의적인 연주방식에 바탕을 둔 명석한 연주 양식을 확립하였다.

토스카니니는 운명을 4번 녹음했다. 뉴욕 필과 2번, NBC교향악단과 2번으로, 1939년 11월 11일과 1952년 카네기 홀에서의 방송연주 실황녹음이 이 음반이다.

곡은 처음부터 군두더기 없이 일사천리 진행된다. 3악장에서 4악장으로 이행되기 전 절제된 동기가 전개되면서 차차 음량을 더해가며 C장조의 4악장으로 돌입하면서 전합주로 진행되는 부분에서는 과연 토스카니니가 스코어대로만 연주하는 지휘자일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39년 연주의 녹음시간 30:25초를 52년 28:36초로 변한 것만 보아도 음악에 대한 그의 견해가 수정되면서 새로운 해석으로 진행되었다는 증거이다.

 

4) 카를로스 클라이버,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카를로스 키이버
    카를로스 키이버

과연 명반이 존재하는가? 누구의 운명이 최고인가? 미학은 주관적이며 감상하는 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다수의 감상자가 뛰어난 연주라고 느끼고 비평가들이 명반이라고 칭한다면 그 음반은 명반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을 것이다.

푸르트뱅글러의 운명이 여전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을 즈음, 1974년 왕년의 명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비엔나 필과의 연주로 운명교향곡을 선보인다.

 

이 음반은 출반되자 마자 메스콤은 센세이션한 반응을 보였으며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판매되었다. 베스트 셀러가 다 명반은 아니지만 그의 운명은 스테레오시대의 최상의 운명이 되어있다.

그는 1930년 7월 3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카를이라고 명명되었는데, 그의 부친이 38년 나찌스와의 불화로 아르헨티나로 귀화함에 따라 스페인풍으로 카를로스라고 개명되었으며, 1980년 1월에 오스트리아 국적을 얻었으므로 현재는 오스트리아 지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에리히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일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특별한 음악교육은 받지 않았으며, 부친의 권유로 스위스 연방공업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지만,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듯, 53년 부친의 반대를 물리치고 뮌헨의 오페레타 극장인 겔트너 프라츠 극장의 무급 견습지휘자로 그의 지휘자의 일생이 시작된다.

클라이버는 음반을 만드는 데에 소극적이었을까, 혹은 신중했을까. 그의 나이 43세인 1973년 데뷔반인 베버의 마탄의 사수가 드렌스덴에서 녹음되어 도이취 그라마폰 레이블로 발매된 후, 이듬해인 74년 이 운명이 녹음된다.

1악장 주제부의 템포는 빠르다. 전개부는 개성적이어서 강한 추진력 속에 세밀한 표정이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흐름의 자연스럼이 보전되어 있다. 3악장의 부드럽게 울리는 비에나 필의 현의 소리는 지휘자의 신선한 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연주에 즉흥성이 내재되어 반복을 단순한 반복으로 그치지 않고, 두번째는 첫번째 연주의 발전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4악장에서는 지휘자의 즉흥성이 반복을 포함한 제시부와 재현부에 여실히 나타나 있는데, 특히 재현부의 대담한 움직임에는 이론적인 면을 뛰어넘는 번득이는 재치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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